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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각 권별 설교

 
작성일 : 21-02-14 19:31
히브리서,,,죽음 그리고 그 이후 9:21-22
 글쓴이 : 제해영
조회 : 22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7절)”는 말씀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죽은 다음에는 선악에 대한 평가와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이 말씀에 대해 이해가 다릅니다. 죽는 것을 단순히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죽기 전에 놀자 ”고 하거나, 죽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일상생활의 의욕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후에 있을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심판을 받는가? 심판의 내용은 무엇인가? 심판을 집행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등등, 각항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해를 하게 됩니다. 오늘은 “죽음과 그 이후”라는 주제에 대해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조망을 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죽음에 대해서

1) 죽는다는 사실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27절)” 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엘리야와 에녹 같은 분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안으로 옮겼지만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의 제동 장치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죽는 것을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알 것인가? 아니면 매일의 삶 속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하며 가치 있게 살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느 지혜자는 자기 방에 해골을 두고 매일 그것을 보는 가운데 죽음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나면서부터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난 존재”라 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은 가느다란 칡넝쿨 줄에 매달려서 바위에 흐르는 꿀을 찍어 먹고 있는데 흰쥐와 검은 쥐가 교대로 나와서 그 칡넝쿨 줄을 갉아먹고 있는 실존”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와 같습니다.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배역이 있습니다. 죽음의 역할은 그 배역 중에서도 아주 바쁜 배역입니다. 배우 중 하나가 쓰러지면, 우리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다른 하나가 쓰러지면 또 그이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모든 세상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만 믿는 것 같습니다. 잠언에 기록하기를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인생의 본분을 잘 교훈 하는 스승이 많지만 죽음 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습니다. 매일 죽음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영생하겠다는 헛된 망상에 쉽게 빠질 것입니다. 죽음 보다 더 좋은 천국 준비 학교는 없습니다. 죽음 보다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는 채찍은 없습니다.

2) 왜 죽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죽음은 운명이고, 자동적으로 온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요 심판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죄가 없으면 죽지 않습니다. 죄가 장성하였기 때문에 사망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죄가 사망을 가져 온 것입니다.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비자연적인 것입니다. 원인 없는 현상이 아니라 원인 때문에 찾아온 결과입니다. 원래부터 죽게 된 것이 아니라, 범죄한 이후에 찾아온 불청객입니다. 올 것이 온 것이 아니라, 오지 않아야 할 것이 느닷없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찾아오지 않을 불청객입니다. 영국의 엘리사벳 여왕은 임종할 때에 “오 하나님이여! 내 소유의 전부를 당신께 드리겠사오니 30분만 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탄식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천하를 가진 자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죽음이 찾아오는 이유는 돈이나 지식이나 건강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죄의 문제입니다. 의사가 암환자의 최종적인 사인을 기록할 때에는 호흡곤란 등으로 처리할 것입니다. 죽음이 왜 오는가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결국은 “죄의 결과는 죽음” 이렇게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죄인입니다. 클로로포름 마취제를 처음 발견하고 사용한 의사가 심프슨이라고 합니다. 그는 “당신이 세상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이 제일로 큰 발견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내가 제일 큰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제일 큰 발견이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금방이라도 돌로 칠 기세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둘러보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 둘 손에 든 돌을 내려놓고 돌아섰습니다. 어느 법관은 수기에서 처음 사형 언도를 내릴 때 마음이 편치 못하여 그날 밤에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고 탄식했습니다.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않는 악만 행하는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했습니다.

3)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살기도 바쁜데 고상한 고민을 할 여유가 없다고 하실 분도 있습니다. 쓸데없이 종교적인 망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는 자연의 한 과정 뿐 이라면 죽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생각조차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하나님 앞에 죄의 문제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극복되어야 하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해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죄의 대가를 받고 죽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됩니다. 목숨이 둘이라서 하나는 버리고 하나라도 남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분의 목숨이 없습니다. 우리 생명 다 바쳐도 내 죄를 가리지도 못합니다.
해결 방법이 무엇입니까? 누군가 대신해서 목숨을 바치면 됩니다. 자신의 죄로 죽지 않아도 되시는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죽으시면 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28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입니다. 죽지 않아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에 많은 짐승들이 죄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사실 그 짐승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천하의 미물이 짐승입니다. 짐승이 어떻게 사람을 대신합니까? 대신 죽은 짐승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죄를 대신해서 죽은 짐승의 실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로 인해 대신 죽으셨고,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분들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원인이 해소되었고 그 결과도 보장받습니다.

4) 죽음을 이긴 결과가 언제 어떻게 나타납니까?
세상에서 당장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지금 죽음이 임하지 않도록 할 능력이 없어서 죽음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죽고, 영혼은 천국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이긴 일차 결과입니다. 그러나 시작이지 끝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죽은 자의 육신도 영혼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이긴 “훌 버전”이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육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당장에 부활하면 되는데 하는 것도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이긴 결과를 줄 것인가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맡겨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최상의 길이기에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식사를 할 때, 스프를 주고 메인 음식을 주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긴 음식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영혼이 천국 가는 것으로 스프를 마시고, 다음에는 재림하실 날에 육체가 다시 사는 부활이라는 메인 음식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해서 영혼이 천국 가고, 예수님 재림하실 그 날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심판에 대하여

1) 심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27절 하반부).”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궁전으로 태우고 가는 엄숙한 마차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그 만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질주의자는 내세가 없습니다. 흙 밖에 없습니다. 육체는 잠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고, 땅으로 내려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나아가서 우리의 영혼이 다른 신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잘못입니다. 염라대왕이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까? 뭘 해주었다고 심판합니까? 다른 신들이 뭘 했다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합니까?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고, 사람을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까지 보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으로 천국의 법정에서 우리가 어떤 말과 행실을 했는지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언행심사 숨기고 변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다 기록하셨습니다. 요즘 사생활을 담은 비디오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혹시 몰래 카메라에 찍힌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우리 인생 전체가 다 찍혀 있습니다. 우리는 변명도 못할 것이고 부인도 못할 것입니다.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얼굴을 들고 마주 대할 수 있습니까?

찰스 피니는 어느 날 한 노인과 이런 대화를 하였습니다. “젊은이 법학을 공부해서 뭐 하려는가?”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돈은 왜 많이 벌려고 하지?”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고 좋은 주택을 갖고 아들 딸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뭘 하지?” “은퇴해서 평안히 살지요.” “그 다음은 뭘 하지?” “죽지요.”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요” 피니는 계속되는 노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는 바로 숲 속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나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았습니다. 피니는 후에 하나님의 능력을 얻고 크게 쓰임 받는 위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유익하듯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알고 살아야 잘사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거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거나, 직장을 갖거나, 노인이 되어서 인생의 마지막을 살거나, 한결같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벌과 멸망에 이르는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과 영광에 이르는 심판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영벌과 영생으로 나눕니까? 죄와 허물을 사함 받고 가리움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죄가 그대로 드러나는 자는 영벌을 받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 앞세워서 일부러 죽게 했습니다. 다윗의 죄가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속의 피로 그의 죄를 덮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다 선언하십니다. 다윗은 죄가 없어서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죄의 가리움을 받음으로 영생에 이르고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믿습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죄가 없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를 가렸기 때문에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 보다 귀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시고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죄 중에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일하는 일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상 받을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네로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로황제는 불법한 재판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을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7-8절).”
바울은 네로의 불법한 재판 보다 하나님의 의로운 재판을 더 의지했습니다. 한결 같이 충성했고,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바울을 자주 면회하여 그의 마음을 유쾌하게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16절).” 그리고 다시 기도합니다.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18절).” 하나님의 상급은 지금 일할 수도 있고, 종말적으로 그 날에 임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산 당신의 신실한 종들에게 하나님은 그 날에 영광스런 상을 주실 것입니다. 소자 아이에게 대접한 물 한 그릇도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2-46).”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